부분 휴거 견해 검토
부분휴거설(Partial Rapture View) 비평
1. 서론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논의되는 휴거 관점들 가운데 부분휴거설은 가장 논쟁적인 견해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전환기전 휴거 입장은 교회 시대의 모든 참된 신자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데리러 오실 때 휴거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부분휴거설은 이와 달리, 영적으로 준비된 특정 신자들만 휴거되고, 육신적이거나 깨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징계나 정결을 위해 대환난의 전부 혹은 일부를 지상에서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부분휴거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주요 주장과 대표적인 옹호자들을 정리한 뒤, 성경적 관점에서 비평한다. 특히 다음의 세 가지 핵심 진리에 집중한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휴거된다 (예: 고전 15:51–52; 살전 4:16–17).
- 구원과 영화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진다 (엡 2:8–9).
- 교회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몸이다 (고전 12:12–13). 휴거 시에 “합당한 자”와 “합당치 않은 자”로 갈라지는 몸이 아니다.
2. 부분휴거설이란 무엇인가?
2.1 핵심 주장
부분휴거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신실하고 깨어 있거나 “이기는 자”인 신자들만 휴거된다.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된 영적인 그리스도인들만 휴거 시 데려감을 받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이며 준비되지 않은 신자들은 땅에 남겨진다고 본다. -
휴거는 구원의 보장이 아니라 신실함에 대한 “상급”이다.
휴거는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순종 가운데 살아간 자들을 위한 상으로 간주된다. -
대환난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휴거가 있을 수 있다.
타락한 신자들이 환난 속에서 연단을 받아 신실하게 되면, 계시록 7장, 11장, 12장, 16장 등과 연결된 후속 “단계별 휴거”를 통해 점진적으로 데려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일부 신자는 아예 첫 휴거에 참여하지 못하고 천년왕국 이후에야 부활한다.
극단적인 견해는 불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첫째 부활”의 특권을 상실하고 (계 20:4–6 참조), 악인들과 함께 나중에야 부활하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요약하면, 휴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은혜의 행위가 아니라, 엘리트적인 일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공로 기반의 특권으로 바뀌어 버린다.
2.2 대표적 옹호자들과 근거 본문
역사적으로, 여러 저자들이 이 견해를 옹호하거나 대중화해 왔다. 최근에는 부분휴거설 혹은 “이기는 자만 휴거” 유형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로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다.
- 위트니스 리(Witness Lee) – 열 처녀 비유(마 25:1–13)를, 준비된 다섯 처녀는 휴거되고 준비되지 못한 다섯 처녀는 남겨지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하였다.
- “이기는 자” 또는 “내적 생명(inner-life)” 운동 계열의 저자들 – 눅 21:36, 히 9:28, 빌 3:11, 고전 9:27 등 “깨어 있으라”는 본문들을 강조한다.
부분휴거설에서 자주 인용하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 마태복음 24:40–41 –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 마태복음 25:1–13 –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 누가복음 21:36 –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 서도록 항상 기도하라”
- 고린도전서 9:27 – 바울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
- 빌립보서 3:10–12 – 바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힘쓰는 모습
- 히브리서 9:28 –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나타나심
- 요한계시록 3:3, 10–11 – “깨어 있는” 자들과 신실한 신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
부분휴거론자들은 이 본문들을, 깨어 있음과 거룩함이 휴거 참여의 조건이라고 전제한 렌즈를 통해 읽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구원의 “열매와 증거”로 제시할 뿐, 휴거 자격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3. 부분휴거설의 해석학적·신학적 문제점
3.1 휴거를 구원의 은혜가 아닌 “상급”으로 재정의한다
성경적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는, 휴거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약속하신 완성된 구원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휴거는 영적으로 엘리트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선택적, 추가적 은혜가 아니다.
바울은 휴거와 부활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소망의 성취로 설명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가 변화되리라.”
— 고린도전서 15:51–52
여기서 대상은 구속받은 자 전체이다. “다 변화되리니”라는 표현은 전면적으로 포괄적이다. 바울은 “너희가 깨어 있다면”이나 “성화의 특정 수준에 도달했다면”과 같은 조건을 덧붙이지 않는다. 이 변화(영화)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에 달린 것이지, 죄와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승리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데살로니가전서 4:14–17에서도 마찬가지다.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
— 데살로니가전서 4:14, 16–17
대상은 단순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과 “우리 살아 남은 자(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규정된다. 제시된 유일한 자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영적 영웅주의에 도달했는지가 아니다.
휴거를 상급(깨어 있음, 사랑, 거룩함에 대한 보상)으로 만들어 버리면, 실질적으로 이중 구조의 구원을 도입하게 된다. 즉, 휴거되는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과 휴거되지 않는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로 나누게 된다. 그러나 신약은 영화(영광의 몸을 입는 것)를 항상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의 공통된 종말적 운명으로 제시한다 (롬 8:30).
3.2 은혜에 의한 구원과 행위에 따른 상급을 혼동한다
성경은 분명히 다음을 구분한다.
- 구원 – 전적으로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행위와는 상관없이 주어진다 (엡 2:8–9; 롬 3:21–26).
- 상급 – 행위에 따라 주어지며, 섬김과 충성의 평가를 따른다 (고전 3:10–15; 고후 5:10; 마 25:14–30).
부분휴거설은 **구원의 핵심 요소인 영화(부활/변화)**를 신자의 성과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이 구분을 사실상 지워 버린다. 이는 은혜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만약 휴거가 신실함에 달려 있다면, 신자의 행위가 그 결정적 구원 사건에 참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로마서 8:30
의롭다 하신 모든 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된다. 영화(그 안에 부활과 휴거의 변화가 포함된다)는 선택적인 상이 아니라, 구원의 필연적인 완성이다.
물론 성경은 신자들에게 거룩과 깨어 있음, 재림에 대한 사모를 강력히 권면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증거와 열매이며, 모든 구원의 약속(그 중 휴거를 포함)을 받는 자격을 “벌어”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3.3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을 분열시킨다
바울은 교회가 한 몸임을 강조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고린도전서 12:12–13
성령세례, 곧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집어넣는 사역은 이 시대에 구원받은 모든 자의 공통된 경험이다. 그 몸 안에 “2등급, 3등급”의 본질적으로 다른 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휴거 시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 나뉘어져, 어떤 지체는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어떤 지체는 땅에 남겨진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로 만드신 것을 분리하는 셈이 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데리러 오실 때, 그분은 몸 전체를 취하신다. 더 “존귀한 지체”만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다.
한 비평가의 표현대로, 부분휴거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 교리를 사실상 부정하면서, 교회를 “휴거 자격이 있는 지체”와 “휴거 자격이 없는 지체”로 나누는 결과를 낳는다.
3.4 “첫째 부활”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버린다
부분휴거론자들은 종종, 신자들이 영적으로 준비될 때마다 대환난 기간 곳곳에서 여러 차례의 소규모 휴거가 발생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부분적 첫째 부활”을 상정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러한 구조를 분명하게 뒷받침하지 않는다.
반대로, 요한계시록 20:4–6은 “첫째 부활”을 의인 전 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집단적 범주로 제시한다. 악인의 부활(천년왕국 끝, 둘째 사망과 연관된 부활)과 대비되는 의인의 부활이 바로 이 “첫째 부활”이다. 이 안에는 여러 “단계”(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교회 성도의 휴거, 대환난 순교 성도의 부활 등)가 있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모든 구속받은 자에게 공통으로 속하는 통합된 범주이지, 개개인의 성화 수준에 따라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경험이 아니다.
3.5 그리스도의 심판석(베마)의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무력화한다
만약 “처음 휴거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신실함에 대한 가장 중요한 상급이며, 남겨지는 것은 불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종의 지상 연옥처럼 기능한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베마)**의 의미 있는 역할은 무엇이 남는가?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들의 행위 평가와 상급 수여가 휴거 이후, 하늘에서, 주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롬 14:10–12; 고전 3:10–15; 고후 5:10). 부분휴거설은 이 평가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환난기의 고난과 환난 속으로 옮겨 버리는데, 이는 신약의 종말론적 구조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4. 부분휴거 옹호자들이 오용하는 본문들
4.1 마태복음 24:40–41 –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 마태복음 24:40–41
부분휴거론자들은 여기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자들”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남겨진 자들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 문맥은 **휴거가 아니라 지상 재림(재림 시 심판)**에 대한 것이다 (마 24:29–31 참조).
-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 17:34–37에서, 제자들이 “주여 어디로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모이느니라”라고 답하신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은 하늘에 올려지는 자들이 아니라 심판에 내어 맡겨지는 자들이다. - 그때에 “남겨진 자들”은(살아남은 의인들) 메시아 왕국(천년왕국)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마태복음 24:40–41은 전환기전 휴거 시의 “신실한 신자와 불신실한 신자”의 분리가 아니라, 재림 시 구원받은 자와 심판받을 자의 분리를 묘사하는 것이다.
4.2 마태복음 25:1–13 – 열 처녀 비유
부분휴거론자들은 보통 이렇게 해석한다.
- 슬기로운 다섯 처녀 = 영적으로 준비된 그리스도인, 휴거에 참여
- 미련한 다섯 처녀 =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대환난에 남겨짐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오해한 것이다.
- 문맥은 교회 시대라기보다 말세의 이스라엘과 그 재림 상황이다.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를 말씀하고 계신다.
- 미련한 처녀들은 신자가 아니다. 그들은 기름(대개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됨)이 없으며, 문이 닫힌 뒤에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라고 선언하신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7:23에서 불신자에게 하신 말씀과 평행한다.
이 비유는 참된 신자와 거짓된 고백자를 대조하는 것이지,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불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나누는 비유가 아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심판을 동반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한 참된 회심과 준비이지, 교회의 부분휴거가 아니다.
4.3 누가복음 21:36 – “능히 피하고 … 서도록 항상 기도하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21:36
부분휴거론자들은 이 구절을, 대환난을 “능히 피하는” 휴거에 참여하려면 기도와 깨어 있음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본다.
그러나 문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 다가올 예루살렘 함락(AD 70)과 최종적인 대환난을 함께 언급하고 계신다. 여기서 “피한다”는 표현은,
- 실제로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일 때 도망가라는 지시를 따르는 물리적 피난(눅 21:20–21)과,
- 재림 심판을 대비한 영적 준비 모두를 포괄한다.
이 구절을, 오직 “지극히 깨어 있는 신약시대 교회 성도들만 휴거로 구출된다”는 기술적인 약속으로 읽는 것은 문맥을 벗어난 해석이다.
4.4 고린도전서 9:27 – 바울의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고린도전서 9:27
일부는 바울이 휴거 특권 상실을 두려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은 구원 자체가 아니라, 섬김과 상급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버림을 당하다”는 것은 경주에서 상(상급)을 받지 못하는 탈락을 뜻하지, 아예 경주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휴거에서 제외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본문은 고린도전서 3:10–15와 마찬가지로 상급 교훈과 연결될 뿐, 부분휴거 구조와는 무관하다.
4.5 히브리서 9:28 –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히브리서 9:28
부분휴거론자들은 이 구절을, “그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만 휴거에 포함된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자기를 바라는 자들”(혹은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은 참된 신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과,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배교자들)을 대비하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히 10:36–39).
다시 말해, 여기의 “기다림”은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영적/육신적)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참 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5. 긍정적 성경 교훈: 누가 휴거되는가?
5.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
휴거에 관한 주요 본문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이다.
- 데살로니가전서 4:16–17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 고린도전서 15:51–52 – “우리가 다 변화되리니”
- 요한복음 14:2–3 – 예수께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가 다시 와서, 그분의 있는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신다.
신약은 부활/변화의 시점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나누어 말하지 않는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엡 1:13–14; 4:30)는 모두 그 마지막 변화와 휴거의 대상이다.
5.2 구원과 영화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휴거가 영화의 일부이고, 영화가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에게 약속되었다면 (롬 8:29–30), 휴거—곧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의 임하심—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이지, 우리의 인내와 성취에 대한 상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물론 행위에 대한 상, 즉 면류관과 직분, 주께로부터의 칭찬은 분명히 존재하며, 거룩한 삶을 향한 강력한 동기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휴거 이후 그리스도의 심판석(베마)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휴거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5.3 교회의 하나 된 “복스러운 소망”
바울은 휴거와 재림을 포괄하는 미래의 소망을 교회의 “복스러운 소망”이라 부른다.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 큰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
— 디도서 2:13
이 소망은 모든 신자가 함께 기다리는 공통의 소망으로 제시된다. 영적으로 우월한 일부 신자를 위한 “특별한 소망”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과 고린도전서 15:51–58의 휴거 교훈은, 모든 성도를 위로하고 굳게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혹시 나만 남겨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 아니다.
6. 결론
부분휴거설은 성경이 분명히 명령하는 정당한 우려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분명히, 깨어 있으며 거룩하게 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 명령들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부분휴거설은 결정적인 선을 넘고 만다. 곧, 누가 그 구원의 절정인 휴거에 참여하는지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신실함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관련 본문들을 문맥 안에서 바르게 다루고, 구원과 교회에 관한 분명한 교리를 존중할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분명해진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휴거된다. 바울이 휴거 본문에서 사용하는 “우리”와 “다”라는 표현에는, 구속받은 자들 안에서의 내적 등급 구분이 전혀 없다.
- 구원(영화를 포함)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 행위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평가·상급의 기준이 될 뿐, 누가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 교회는 하나의 몸이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데리러 오실 때, 그분은 자신의 몸 일부를 절단하거나, 신부의 일부분을 버려두지 않으신다.
따라서 부분휴거설은 해석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성경적 종말론의 틀 안에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분명히 깨어 기도하며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휴거에 참여할 자격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리가 확증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날 주 앞에 서게 될 때 이렇게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태복음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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