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난 중간 휴거설(Mid-Tribulationalism) 분석

최종 수정: 2025년 12월 25일종말론

대환난 중간 휴거론(Mid‑Tribulationalism) 분석

1. 서론

대환난 중간 휴거론(Mid‑tribulationalism)은 성경적 종말론에서 휴거(Rapture)의 시기를 이해하는 여러 견해 가운데 소수지만 꾸준히 유지되어 온 입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미래에 성취될 7년 대환난) 중 전반부 3년 반을 통과한 뒤, 정확히 혹은 거의 그 중간 지점에서, 곧 “큰 환난”이 시작되기 직전에 휴거된다고 본다.

이 글은 대환난 중간 휴거론을 정의하고, 그 핵심 논거들(특히 “마지막 나팔” 논증)을 정리한 후, 성경적으로 평가한다. 이를 통해 교회가 다니엘의 칠십 이레 후반부만이 아니라 전 7년 전체로부터 면제된다는 점을 함께 밝힐 것이다.

2. 대환난 중간 휴거론이란 무엇인가?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다니엘의 칠십 이레(다니엘 9:27)는 아직 미래에 성취될 실제 7년 기간이다.
  • 그중 후반부 3년 반만이 엄밀한 의미의 “환난” 곧 “큰 환난”(마태복음 24:21)에 해당한다.
  • 교회는 “재난의 시작”(마태복음 24:8)으로 이해되는 전반부 3년 반은 경험하되, 중간 시점에 휴거되어, 그 직후에 쏟아질 하나님의 종말론적 진노가 본격화되기 전에는 지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임하심(휴거)과, 영광 중에 교회와 함께 다시 오시는 재림은 구별되지만, 그 간격은 3년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 견해의 대표적 옹호자로는 J. 올리버 버스웰(J. Oliver Buswell), 글리슨 아처(Gleason Archer), 메릴 테니(Merrill Tenney) 등이 있다.

3. 대환난 중간 휴거론의 주요 주장들

3.1 3년 반 시점에 대한 강조

대환난 중간 휴거론자들은 예언적 본문들이 반복적으로 3년 반을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다니엘 7:25; 12:7; 요한계시록 12:14)
  • “1,260일” (요한계시록 11:3; 12:6)
  • “마흔두 달” (요한계시록 11:2; 13:5)

이 반복은 칠십 이레의 중간 지점이 결정적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곧 이 시점에:

  •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다니엘 9:27),
  •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며(마태복음 24:15),
  • 극심한 박해와 심판이 시작된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이 중간 지점에는 분명한 전환을 표시할 어떤 중대한 사건이 있어야 하며,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그 사건을 교회의 휴거라고 규정한다.

3.2 “마지막 나팔” 논증

대환난 중간 휴거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5:52의 “마지막 나팔”과 데살로니가전서 4:16의 나팔이 반드시 요한계시록 11:15일곱째 나팔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 고린도전서 15:52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 요한계시록 11:15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 휴거는 “마지막 나팔”에 일어난다(고린도전서 15:52).
  • 요한계시록의 일곱째 나팔은 일련의 나팔들 가운데 마지막 나팔이다.
  • 일곱째 나팔은 칠십 이레의 **중간부 시점(혹은 직후)**에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 그러므로 휴거는 대환난의 중간 즈음에 일어난다고 결론짓는다.

3.3 두 증인을 교회의 모형으로 보는 해석

요한계시록 11장은 예루살렘에서 1,260일(3년 반) 동안 예언하는 두 증인을 묘사한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장사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 요한계시록 11:12

어떤 대환난 중간 휴거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이 두 증인은 교회 혹은 교회의 대표적 성도들을 상징한다.
  • 그들이 칠십 이레의 중간 시점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바로 교회의 휴거를 예표한다.
  • 이 들림 사건은 일곱째 나팔과 맞물리며,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과도 연결된다.

다른 이들(예: 버스웰)은 두 증인이 곧 교회를 상징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두 증인의 들림과 교회의 휴거가 모두 중간 시점에 함께 일어난다고 본다.

3.4 전반부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는 주장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보통 7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전반부 3년 반: “재난의 시작”(마태복음 24:8)으로, 주로 사람과 사탄의 진노—박해, 전쟁, 기근—가 나타난 시기.
  • 후반부 3년 반: “큰 환난”과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시기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특히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가 쏟아지는 시기.

이들은 교회가 “진노에 세우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데살로니가전서 1:10; 5:9)고 하면서,

  •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기 전에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전반부는 아직 “하나님의 진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탄의 활동이므로, 그 전에 교회가 반드시 제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결국 교회는 대환난 중간에 휴거되어, 본격적인 신적 진노가 시작되기 직전에 세상에서 옮겨진다는 것이다.

4. 대환난 중간 휴거론에 대한 성경적 평가

4.1 전반부는 정말 하나님의 진노와 무관한가?

대환난 중간 휴거론의 핵심 전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진노가 중간 시점 이후에야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자체는, 구약의 증언과 조화를 이루며, 초기 재앙들 역시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제시한다.

4.1.1 어린 양이 인을 떼심

요한계시록 5–6장에 따르면, 인을 떼는 분은 바로 어린 양이시다.

“또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 5:2, 5

요한계시록 6장과 8장 1절에 나오는 각 인 심판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권위에서 직접 비롯된다. 하나님이 인간과 악한 영을 도구로 사용하실지라도, 그 근원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첫 네 인, 곧 “네 말 탄 자”(6:1–8)는 정복, 전쟁, 기근, 사망을 가져온다. 이러한 재앙들은 구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로 묘사된다(에스겔 14:21; 레위기 26:21–28; 신명기 28:20–26 참조).

4.1.2 여섯째 인에서 선포되는 어린 양의 진노

특히 여섯째 인에서는 불신자들 스스로가 이 재앙들의 근원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6:16–17

여기서 “이르렀으니”로 번역되는 동사는 헬라어 *ἦλθεν(ēlthen)*으로, 이미 도래하여 현재 진행 중인 진노를 가리키는 상(aorist indicative)이다. 단순히 “곧 시작될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그 효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섯째 인이 이를 때까지 이미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으며(요한계시록 6:8), 생존자들조차 이것을 단순한 인간의 분노나 사탄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발현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볼 때,

  •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인 재앙들, 곧 칠십 이레의 초기 국면에서부터 작동하고 있다.
  • 하나님의 진노를 후반부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본문 전체의 흐름과 어긋난다.

그렇다면, “장차 임할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데살로니가전서 1:10)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데살로니가전서 5:9)라는 약속에 일관되게 서려면, 교회는 이 종말론적 심판의 연속이 시작되기 이전, 곧 처음 인이 떼어지기 전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후반부만이 아니라, 전 7년으로부터의 면제를 가리킨다.

4.2 “마지막 나팔”은 일곱째 나팔인가?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고린도전서 15:52의 “마지막 나팔”을 요한계시록 11:15일곱째 나팔과 동일시하는 데 논리의 상당 부분을 의존한다. 그러나 이 동일시는 여러 면에서 해석학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4.2.1 전혀 다른 문맥과 기능

  • 고린도전서 15:52데살로니가전서 4:16에서 나팔은

    • 교회 시대 성도들의 부활,
    • 살아 있는 성도의 변화와 들림,
    • 교회가 그리스도께 모이는 기쁨의 집합과 연결된다.
  • 반면, 요한계시록 11:15의 일곱째 나팔은

    • 추가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 요한계시록 8–11장의 일련의 천사적 나팔 심판들 중 하나로서, 불신 세계를 향한 진노의 나팔이다.

즉, 두 나팔은 그 목적과 기능이 전혀 다르다.

  •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나팔”은 성도들을 영광으로 불러 모으는 구원의 나팔,
  • 계시록의 일곱째 나팔은 세상을 심문하는 심판의 나팔이다.

단지 “나팔”과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사용된다고 해서 동일한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언제나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

4.2.2 “마지막”이라는 말의 의미

고린도전서 15:52에서 “마지막”을 의미하는 단어는 헬라어 *ἔσχατος(eschatos)*이다. 이 단어는 모든 나팔 소리 가운데 절대적 시간 순서로 최후라는 뜻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다. 보다 자연스럽게는,

  • 교회 시대를 마감하는, 곧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나팔,
  • 교회의 부활과 휴거를 알리는 종결적 신호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성경과 유대 묵시문학은 여러 종류의 종말론적 나팔을 묘사한다(심판, 회집, 해방 등). 신약 안에서도 서로 다른 종말적 나팔들이 나타난다(마태복음 24:31; 고린도전서 15:52; 요한계시록 8–11장).

특히, 마태복음 24:31은 대환난이 끝날 때 불려, 환난을 통과한 택한 자들(특히 이스라엘)을 사방에서 모으는 또 다른 나팔을 말한다. 연대기적으로 **“마지막”**이라 부르려면, 오히려 이 나팔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은 요한계시록의 일곱째 나팔이 아니라, 교회 부활과 휴거라는 구속사의 한 국면을 마감하는 결정적 나팔로 보는 것이 본문의 기능과 조화를 이룬다.

4.3 두 증인은 교회를 상징하는가?

두 증인을 교회의 상징으로 보는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1. 본문의 문자적 묘사

    요한계시록 11장에 따르면 두 증인은

    • 예루살렘에서 예언하고,
    • 불을 내리고, 비를 멈추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등 특정한 기적을 행하며,
    • 죽임을 당해 시체가 성의 큰 길에 3일 반 동안 놓여 있고,
    • 그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동과 사건의 묘사는, 두 실제 인물을 가리킨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단순한 교회 전체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기 어렵다.

  2. 보편적 순교 문제

    만약 두 증인이 교회를 상징한다면 다음과 같은 난점이 생긴다.

    • 교회의 전반부 사역이 사실상 예루살렘에 한정되어야 한다.
    • “모든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가 그들의 시체를 보려면(요한계시록 11:9),
      교회 전체가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공공연히 전시되어야 한다.
    • 또한 교회 전체의 부활과 휴거는 그 보편적 순교 후 3일 반 뒤에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귀결은 상식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다른 예언 본문들과도 배치된다.

  3. 일곱째 나팔과의 순서 문제

    설령 두 증인을 상징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요한계시록 11장의 서술 순서를 주목해야 한다.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은 일곱째 나팔이 불리기 전에 일어난다(요한계시록 11:11–15).
    이는 고린도전서 15:52의 순서와 정반대이다.

    • 고린도전서에서는 나팔이 먼저 울리고,
    • 그 후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자들이 변화된다.

    따라서 두 증인의 사건과 일곱째 나팔의 연대기적 배치 역시, 대환난 중간 휴거론의 핵심 연결 고리를 약화시킨다.

결론적으로, 두 증인은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는 실제 예언자들(종종 모세와 엘리야와 연결됨)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들의 부활과 승천은 대환난 시기 안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표징이지, 교회 전체의 휴거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4.4 다니엘의 칠십 이레의 구조와 목적

다니엘 9:27은 칠십 이레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위에 정하신 단일한 7년 기간으로 제시한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 다니엘 9:24

이어지는 목적들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그 성(예루살렘)**을 향해 있다.

  • 허물을 마치게 하며,
  • 죄를 끝내며,
  • 죄악을 속량하며,
  • 영원한 의를 드러내며,
  • 환상과 예언을 응하게 하며,
  •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게 하려 함.

성경 전체에서 이 7년 대환난은

  • “야곱의 환난 때”(예레미야 30:7)로 불리며,
  •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개와 회복으로 귀결된다(예레미야 30:7–9; 스가랴 12:10; 로마서 11:25–27).

반면, 교회

  • 구약에 드러나지 않고 신약에서 계시된 비밀(에베소서 3:3–6; 골로새서 1:26–27)이며,
  • 오순절(사도행전 2장)에 시작되었고,
  • 이스라엘과 구별되는 공동체이다(고린도전서 10:32; 로마서 11장).

이처럼 칠십 이레 전체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향해 정하신 기간이라면, 그 7년 중 절반만 교회가 통과한다고 보는 것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칠십 이레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휴거되어, 그 기간 전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성취하시는 특별한 시기가 되는 것이 조화롭다.

4.5 “시험의 때로부터” 지키신다는 약속

요한계시록 3:10은 교회의 휴거 시기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요한계시록 3:10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 주님의 약속은 단지 시험 자체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시험의 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곧 전 세계적 시험이 진행되는 시간대 전체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 이 시험은 “온 세상”에 임한다고 했으므로, 특정 지역의 박해가 아니라, 전 세계적 대환난을 가리킨다.
  •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완강한 불신자들을 지칭하는 기술 용어로 사용되며, 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지켜… 면하게 하리니”로 번역되는 헬라어 *τηρέω ἐκ(tēreō ek)*는 요한복음 17:15에도 사용되는데, 가장 자연스럽게는 그 시간대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보존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 안에 머무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해석보다, “애초에 그 시기에 속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더 어법과 문맥에 적합하다.

여기에 “우리를 장차 올 진노에서 건지시는 예수”(데살로니가전서 1:10)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데살로니가전서 5:9)라는 약속을 결합할 때, 교회는 종말론적 진노의 시간 전체로부터 면제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를 단지 “후반부”에 대한 면제로 축소하는 것은 본문의 직설적인 약속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4.6 임박성(Imminence)의 상실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본질적으로 신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약화시킨다. 만일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면,

  • 적그리스도와의 언약 체결(다니엘 9:27),
  • 열 나라(혹은 열 뿔) 연합의 등장,
  • 요한계시록의 초기 인 재앙들,
  • 멸망의 가증한 것의 설정(마태복음 24:15),

성도들은 진정으로 언제든지 임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없게 된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 먼저 일정한 예언적 사건의 타임라인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고,
  • 최소한 3년 반 동안의 대환난 전반부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약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 데살로니가전서 1:10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 디도서 2:13

이러한 끊임없는 기대와 대망의 태도는, 휴거가 아무런 전조 사건 없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이해할 때 가장 자연스럽다. 반대로, 반드시 대환난 전반부를 거쳐야 한다면, 성도는 당장 그리스도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대환난의 시작과 중간 지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는 신약이 가르치는 재림 신앙의 긴장과 임박성을 약화시킨다.

5. 왜 교회는 다니엘의 칠십 이레 전체로부터 면제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적 자료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일관된 그림이 드러난다.

  1. 하나님의 진노는 칠십 이레 전체를 관통하며, 첫째 인이 떼어지는 순간(요한계시록 6장)부터 이미 발동된다.
  2. 교회는 “장차 올 진노에서 건지심”(데살로니가전서 1:10)과 “진노에 이르지 않게 하심”(데살로니가전서 5:9)을 약속받았으며,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로부터 지키신다”(요한계시록 3:10)는 약속을 받았다.
  3. 다니엘의 칠십 이레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위에 정해진 기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시고 민족적 회개와 회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다니엘 9:24–27; 예레미야 30:7).
  4. 교회는 이 시대에 형성된 별도의 공동체로서, 구약의 대환난 예언들 속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요한계시록 4–18장에서도 지상 공동체로서 언급되지 않는다.
  5. 휴거는 임박한 사건으로 제시되며, “주의 날” 이전의 사건으로 배치되고(데살로니가전서 4:13–5:9),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주어진다. 이런 특성은 휴거가 칠십 이레의 시작 전에 일어난다고 볼 때 가장 잘 설명된다. 중간 혹은 마지막에 일어난다고 보면, 임박성과 위로의 성격이 현저히 약화된다.

따라서 교회는 칠십 이레의 후반부만이 아니라 전 7년 전체로부터 면제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과 조화를 이룬다. 휴거를 대환난 중간에 배치하는 해석은

  • 초기 인 재앙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어느 정도 분리시키고,
  •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나팔”과 요한계시록 11장의 일곱째 나팔을 억지로 동일시하며,
  • 두 증인의 사건을 교회 전체의 모형으로 과도하게 상징화하고,
  • 재림의 임박성을 약화시키며,
  •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6. 결론

대환난 중간 휴거론은 전환적 입장으로서, 전대환난 휴거(Pre‑tribulation Rapture)와 대환난 전체를 통과하는 견해 사이에서 “타협적 중간 지점”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핵심 기둥들—“마지막 나팔”과 일곱째 나팔의 동질성 주장, 두 증인을 교회의 대표로 보는 해석, 전반부는 아직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는 주장—은 세밀한 본문 해석 앞에서 충분히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은 다니엘의 칠십 이레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통합된 7년의 시기로 제시하며, 시작부터 끝까지 어린 양의 진노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동시에, 교회는 그 진노와 그 진노가 쏟아지는 시간 자체로부터 건짐을 약속받았으며, 언제든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면받는다.

이러한 성경적 토대 위에서 볼 때, 휴거는 칠십 이레의 중간이 아니라 시작 이전, 곧 대환난이 개시되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휴거는 하나님의 진노 중 절반만을 면제받는 “중간 구출”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할 종말론적 시험의 시간 전체로부터 교회를 건져내시는 전대환난적(Pre‑tribulational) 구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 데살로니가전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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